가을이 문턱에 들어서면 숲길 어디선가 붉은 불길이 피어난다. 초록 잎 하나 보이지 않는 땅 위로 가느다란 꽃대가 솟아오르고, 그 끝에서 붉은 꽃송이들이 한꺼번에 터진다.
마치 땅속에 숨겨두었던 붉은 불씨가 온 산을 태우듯 빨갛게 번져 간다. 한 송이 한 송이 수만 송이가 모여 만든 거대한 꽃바다 속으로 속절없이 뛰어든다. 이내 정신조차 혼미해진다. 누군가는 이를 ‘무아지경’이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서천 서역국의 전설의 꽃밭이라고 귀띔한다.
가냘픈 초록 꽃대에 의지하여 붉게 핀 석산은 9월 중순 무렵부터 뭇사람의 시선을 잡아 묶는다. 석산(石蒜) [학명: Lycoris radiata (L'Hér.) Herb.]이 정명이고 이명인 ‘꽃무릇’이라고도 부른다. 석산은 수선화과에 속하며 상사화속으로 분류된다. 9월 추분 무렵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의 산사와 숲길을 붉게 물들인다. 고창 선운사와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등이 대표적인 석산 군락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최근 중부지방에도 식재가 늘어나고 있다.
붉은색 군락으로 무리 지어 피는 석산은 유난히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다. 잎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는 꽃이 없다. 한 뿌리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얄궂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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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성남시 분당 중앙공원의 석산의 개화 |
| ⓒ 동부중앙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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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서로 만날 수 없는 석산을 사람들은 ‘상사화(相思花)’, ‘피안화(彼岸花)’라 불렀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그리움의 상징으로 남은 것이다.
꽃과 사랑은 어쩌면 분리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꽃 이야기에는 사랑이, 사랑에는 꽃이 등장한다. 산중에 특히나 사찰 주변에 피어나는 붉디붉은 석산에 애틋한 전설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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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렬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석산 |
| ⓒ 동부중앙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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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산사에 젊은 스님이 수행 정진하고 있었다. 하루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젊은 여인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산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 여인은 불공을 드리고 바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덜컥 병이 나 여러 날을 산사에 머물게 된 것이다. 스님은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간호하며 서로의 마음속에 조용히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가슴속 사랑은 거대한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지만, 스님은 출가한 몸이라 애끓는 마음을 전할 수 없었다. 여인이 돌아간 후 스님은 치유할 수 없는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그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후 그가 열반했던 주변에서 강렬한 붉은 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꽃이 지고 난 다음에야 잎이 돋아났다. 세상 사람들은 그 꽃을 바라보면서 “서로 사랑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구나. 꽃과 잎처럼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하며 상사화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지역에 따라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생태적 특징에 사람의 사랑과 이별을 겹쳐 만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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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산을 가깝게 관찰하면 꽃의 수술이 밖으로 나와 왕관처럼 보인다. |
| ⓒ 동부중앙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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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석산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다른 생각이 든다. 정말 이 꽃은 슬픈 꽃일까. 식물학적으로 석산의 꽃과 잎이 만나지 않는 것은 특별한 생육 방식 때문이다. 초가을에 잎이 없는 상태에서 먼저 꽃을 피우고, 꽃이 진 뒤 잎이 돋는다. 잎은 겨울 동안 광합성을 하며 땅속 알뿌리에 양분을 저장하고 이듬해 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리고 몇 달 뒤 다시 꽃대가 올라온다. 꽃이 떠난 자리에 잎이 오고, 잎이 사라진 자리에 꽃이 온다. 우리는 이것을 ‘만날 수 없는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식물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서로의 생명을 이어주는 정교한 질서다.
꽃이 피어야 할 때 잎은 꽃에 온 에너지를 몰아주고 잠시 물러난다. 잎이 자라야 할 때 꽃도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사라진다. 서로 만나지는 않지만,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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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영광 불갑사 담장 아래 잎은 자취를 감추고 붉게 피어난 석산 |
| ⓒ 동부중앙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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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도 이와 닮았다. 부모는 자녀가 자라면 자신의 자리를 조금씩 뒤로 물린다. 자녀 역시 어느 순간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곁에 붙잡아 두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때로는 떠나보내고, 기다려주고,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내가 빛날 수 있도록 뒤에서 물러난 사람, 내가 잘될 수 있도록 자신의 시간을 내어준 사람, 내가 앞에 설 때 기꺼이 뒤에 서준 사람이 있다.
내가 혼자 피어난 줄 알았던 자리에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고귀한 시간이 함께 있었다. 나는 석산을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꽃’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석산은 서로의 자리를 지켜주는 사랑의 꽃이다.
꽃이 지면 잎이 오고, 잎이 지면 다시 꽃이 온다. 만나지 못하면서도 서로의 생명을 이어가는 석산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삶을 위해 기꺼이 한 걸음 물러설 때가 있다. 이때가 정말 행복이 샘솟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