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이 땅에 봄을 알리는 생강나무꽃) | | ⓒ 동부중앙신문 | |
봄은 산속 생강나무 한 그루가 노랗게 불을 밝힐 때 시작된다.
봄은 산속 생강나무 한 그루가 노랗게 불을 밝힐 때 시작된다. 달력은 3월을 가리키지만, 숲은 늘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절을 알린다. 겨울빛이 아직 가지 끝에 남아 있는 어느 날, 산길을 걷다 보면 문득 노란 기운이 눈길을 끈다. 잘 튀겨진 팝콘처럼 몽글몽글 부풀어 오른 꽃, 노랗게 피어나는 생강나무를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사람들은 어둡던 숲에 봄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생강나무(학명: Lindera obtusiloba Blume)는 중간 키에 단풍이 드는 낙엽 활엽수로, 암수가 서로 다른 그루다. 꽃은 잎이 나기 전에 잔가지 끝마다 작은 꽃들이 둥글게 모여 노랗게 부풀어 오른다. 멀리서 바라보면 잿빛 숲 곳곳에 노란 불씨가 흩어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꽃을 두고 “숲에 가장 먼저 내려앉은 봄의 불빛”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나무의 이름에는 향기가 깃들어 있다. 가지나 잎을 비비면 생강을 떠올리게 하는 매운 향이 퍼져 나온다. 그 향은 곧 이름이 되었다. 옛사람들은 이 나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어린잎은 차로 달여 마셨고, 까만 열매에서는 기름을 짜냈다. 그 기름은 동백나무에서 얻는 동백기름처럼 부인들의 머릿기름으로 쓰였다. 은은한 향과 반짝이는 윤기는 양반가 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 | | ↑↑ (남부지방에 피는 붉은 동백꽃) | | ⓒ 동부중앙신문 | |
남쪽 지방에서는 동백이 겨울 바다를 붉게 물들이지만, 추운 중부의 산에서는 생강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산동백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강원도에서는 정겹게 ‘동박나무’라는 이름도 붙였다. 산속에 사는 이들에게 이 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생강나무가 노랗게 피면 밭을 갈 준비를 한다.” 꽃이 피는 시각이 곧 삶의 시계였고, 자연이 곧 달력이었다. |  | | | ↑↑ ( 산수유꽃을 생강나무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 | ⓒ 동부중앙신문 | |
봄이 시작될 무렵 생강나무와 함께 자주 불리는 꽃이 있다. 바로 산수유다. 두 나무는 형제처럼 닮은 듯 노랗게 피어나지만, 살아가는 자리가 다르다. 산수유는 마을 어귀나 집 주변에서 봄을 밝히지만, 생강나무는 깊은 산에서 봄을 깨운다. 마을의 봄과 산의 봄이 서로 다른 길로 오다가, 어느 순간 한 자리에 겹치면 이 강산에는 꽃노래가 울려 퍼진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이 나무는 한국 문학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봄의 꽃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김유정의 ‘동백꽃’이다. 사람들은 제목을 보고 붉은 동백꽃을 떠올리지만, 작품 속 동백꽃은 남쪽 바닷가의 동백이 아니다. 강원도 산골에서 ‘동백꽃’이라 부르던 바로 그 나무, 노란 꽃 생강나무를 가리킨다. 소설 속에서 점순이와 함께 드러누워 흐드러진 노란 동백꽃 향기 속으로 파묻혀 버렸던 그 몽롱한 순간, 생강나무꽃은 그들을 휘감았다. 산에서 만나는 생강나무꽃은 화려하지 않다. 매화처럼 고고하지도 않고, 벚꽃처럼 눈부시게 흩날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직 겨울이 물러나지 않은 숲에서 가장 먼저 빛을 밝히는 존재는 늘 이 나무다. 쉽게 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여도 그윽한 향기가 자신을 알린다. 잎도 없이 꽃부터 피우는 그 모습은 어딘가 성급해 보이지만, 바로 그 성급함이 계절을 움직인다. 고요하던 숲은 그 작은 노란 기척 하나로 서서히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도 이와 닮았다. 아직은 춥다고 느끼는 사이, 어딘가에서는 이미 봄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먼저 희망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아직 겨울을 이야기한다. |  | | | ↑↑ (생강나무꽃이 한 나무에 촘촘하게 피면 수나무 가능성이 99%다.) | | ⓒ 동부중앙신문 | |
그 사이에서 생강나무는 아무 말 없이 꽃을 피운다. 봄은 거창한 선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먼저 피어나는 한 존재로부터 시작된다는 듯이 어두운 산속에 불을 밝힌다. 그래서 이른 봄 산에서 생강나무꽃을 만나면 사람들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아직 차가운 공기 속에서 노란 꽃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숲은 여전히 겨울의 빛을 머금고 있지만, 그 작은 꽃 하나가 계절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어쩌면 김유정의 소설 속에서 점순이가 던지던 노란 꽃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아직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꽃이 되어 날아가던 순간. 산길 위에 떨어진 꽃잎들은 한 시절의 서툰 감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서 다시 피어나는 생강나무꽃은 조용히 속삭인다. 봄은 늘 그렇게, 가장 먼저 피어나는 작은 마음 하나에서 시작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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