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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이 낳은 독립투사 이수흥 의사 '제83주기 추모제' 실시
27일 이천시 창전동 소재 이수흥공원 동상 앞에서 애국애족 정신과 얼 계승하고자...
김덕기 기자 / kdg6988@naver.com 입력 : 2012년 02월 27일(월)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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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27일 열린 이수흥 의사 제83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관내 기관.단체장 등이 추모제를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 김덕기 기자 | | 경기도 이천이 낳은 독립투사 이수흥 의사 제83주기 추모제가 27일 오전 10시 이천시 창전동 이천초등학교 앞 이수흥공원 내 동상 앞에서 실시됐다.
이날 추모제에는 추모제를 주관한 국제와이즈멘이천클럽 박창근 회장, 조병돈 이천시장, 하열우 이천교육지원청 교육장, 이현호 전 이천시의회 의장, 연안이씨종친회원 등이 참석해 이수흥 의사를 비롯한 순국열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계승하고 추모했다.
이수흥 의사는 일찍이 구국운동에 헌신한 부친 이일형의 사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배일사상이 싹트기 시작했고 일본식교육에 반발해 13세 때 재학 중인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자퇴했다.
이후 14세 때 입산해 3년간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19세가 되던 1923년 만주로 건너가 정신적 지주인 채상덕을 만나 김좌진 장군이 사관 양성을 위해 지린성에 설립한 신명학교에서 전술교육 등을 받으며 독립군 간부로서의 훈련을 이수하고 대한통의부에 가담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전덕원 등이 국내 일본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대한통의부에서 떨어져 나와 환런 현에서 의군부를 조직하자 이에 참여하여 무장항일투쟁을 했으며, 상해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육군주만참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해 활동했다.
1924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국경지방을 시찰하기 위해 경비정을 타고 압록강을 내려오는 것을 기습했으나 사살에는 실패했고, 1925년 육군주만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로 임명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전투에 대패해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5월 때를 기다려 오던 이수흥은 단신으로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처형하기 위하여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 획득을 위해 황해도 평산의 김상렬, 함성호 등에게 헌금을 요구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동년 7월 10일 서울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유택수와 함께 군자금 요청을 거절하는 안성의 부호 박승육의 아들 박태병을 처형했고, 10월 이천군 현방주재소를 습격, 다시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한 이후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수원에 가서 장례를 치르고 이천으로 왔다가 11월 6일 체포되어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1927년 2월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교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수흥 의사는 처형장에서 사행집행관이 마지막 유언을 하라고 하자 "내가 기필코 대한 독립을 성취시키려고 하였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독립)를 못맺고 가게 됨이 원통한 즉 우리 동포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독립을 성취하여 주기 바란다"며 세 번의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친 후 수형대에 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1962년 3.1절을 맞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으며, 유해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 애국선영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한편 국제와이즈멘 이천클럽은 지난 2002년부터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얼을 계승하고 발전해 애국애족심을 고취시켜 나가기 위해 이수흥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2월 27일을 기해 매년마다 추모제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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