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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태 숲 해설가의 나무 이야기 -풍년화-
풍년을 부르는 꽃
유미란 기자 / news9114@daum.net입력 : 2026년 03월 10일(화)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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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해설가 원종태
ⓒ 동부중앙신문
중부지방의 2월은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다. 잎을 내려놓은 나무들이 모두 맨몸이다. 좀 더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고요한 시간, 그 적막을 깨고 노란 꽃이 불씨처럼 타오른다. 마치 어두운 밤에 횃불을 만난 듯이 눈이 번쩍 뜨인다. “아니 벌써?” 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면 은근하고 그윽한 향이 코를 찌른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이 땅에 봄이 옴을 알리는 풍년화(학명: Hamamelis japonica)가 그 주인공이다. 조록나뭇과의 작은 키 나무로 넓은 잎에 낙엽이 지며 5미터 정도까지 자란다.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이 겹쳐 있는 시간, 이 나무는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풍년화의 꽃잎은 독특하다. 리본처럼 가늘고 길게 꼬여 있다. 마치 곱게 썰어 얹은 달걀지단 고명처럼 보인다. 추위가 닥치면 꽃잎을 오므렸다가 기온이 오르면 다시 펼친다. 마치 숨을 고르듯 피고 접기를 반복하는 생명체 같다. 혹독한 환경에 맞서는 대신, 상황에 맞추어 몸을 조절하는 전략이다.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기민함이 있어 오랜 기간 꽃이 피어 있다. 강인함이란 무조건 버티는 힘이 아니라,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임을 스스로 보여준다.
↑↑ (만개한 노란 풍년화 꽃잎이 홉사 달걀지단처럼 보인다. )
ⓒ 동부중앙신문

‘풍년화(豊年花)’라는 이름에는 농경 사회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이 꽃이 풍성하게 피면 그해 농사가 잘된다는 믿음. 과학적으로 입증된 예언은 아니지만, 그 상징은 분명하다. 겨울을 무사히 건너왔다는 안도감과 계절의 질서가 제때 돌아왔다는 확신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자연의 작은 변화를 읽으며 삶의 방향을 가늠한다. 풍년화는 그 ‘읽힘’의 대상이다.
꽃이 언제 피는가는 식물에는 매우 중요한 생존의 문제다. 곤충의 활동 시기와 맞아야 하고, 씨앗을 맺을 충분한 시간도 확보해야 한다. 같은 종이라도 지역과 개체에 따라 개화 시기를 달리하는 것은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전략이다.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식물에 ‘최적기’란 가장 많은 꽃을 피울 수 있는 때다. 자연은 서두름보다 정확함을 택한다.
시계가 없던 시절, 꽃은 곧 시간이었고 농사 달력이었다. 분꽃이 피면 저녁밥을 지을 때가 되었고, 달맞이꽃과 자귀나무꽃이 열리면 해 질 녘이 가까웠음을 알았다. 박꽃이 오므라들면 새벽이 머지않았다. 대추나무꽃이 피면 모내기를 서둘렀고, 감나무 잎이 쌀알만큼 자라면 콩을 심었다. 참나리꽃이 피면 감자를 심고, 도라지꽃이 피면 장마를 대비했다. 꽃은 풍경이 아니라 신호였다. 자연의 언어를 읽는 능력이 곧 삶의 기술이었다.
↑↑ (폭설에 덮인 주황색 풍년화)
ⓒ 동부중앙신문
정원 문화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이른 봄의 매화, 초여름의 모란과 장미, 한여름의 백일홍과 무궁화, 능소화와 석류, 가을의 국화까지. 사람들은 사계절의 흐름을 집 안으로 들여와 배치했다. 꽃은 시간을 장식하는 방식이자, 시간을 체감하는 장치였다.
풍년화의 또 다른 비밀은 열매에 있다. 봄에 꽃을 피운 뒤 맺힌 열매는 무려 여덟 달을 자라 가을에 익는다. 충분히 마르면 껍질이 ‘툭’ 하고 터지며 씨앗을 멀리 튕겨 보낸다. 긴 기다림 끝의 단 한 번 도약. 봄의 개화가 희망이라면, 가을의 파종은 미래를 향한 투신이다. 한 나무 안에 인내와 비상이 함께 깃들어 있다.
풍년화와 가까운 종인 미국 풍년화(Hamamelis virginiana)는 오늘날 ‘위치하젤’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피부를 진정시키고 상처를 가라앉히는 성질 때문에 화장품과 약용 제품에 널리 쓰인다. 사람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성분이 되기까지, 자연은 오랜 시간 자신의 성질을 축적해 왔다. 꽃의 상징이 인간의 일상 속 효용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움과 쓰임은 분리되지 않는다. 자연은 상징과 실용을 동시에 품는다.
↑↑ (눈 속에 핀 노랑 풍년화)
ⓒ 동부중앙신문
해마다 풍년화를 마주하며 나는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풍년이라 부르는가. 곡식이 넘치는 해만을 말하는가, 아니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찾는 시간을 말하는가. 겨울의 끝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풍년이란 어쩌면 ‘제때 피어나는 용기’가 아닐까. 자신의 역할을 적시에 할 줄 안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존재의 가장 가치 있는 사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른 개화를 재촉한다. 남보다 먼저, 더 크게, 더 화려하게 피라고 등을 떠민다. 그러나 풍년화는 가장 추운 시기를 통과한 뒤, 자신이 준비된 순간에만 꽃을 연다. 그리고 다시 오므릴 줄도 안다. 열정과 절제가 한 몸이다.
이른 봄, 아직 다른 꽃은 피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노란 꽃잎이 가늘게 흔들린다. 흔들림 속에 퍼져 가는 향기는 매우 감미롭다. 이때를 기다린 벌들이 잔치를 벌인다. 마치 굶주린 배를 채워 주려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과도 같다. ‘서두르지 말라. 때가 오면 피어난다.’ 풍년화는 한 해의 풍요를 점치는 나무이기 이전에, 시간을 믿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인지도 모른다. 풍년화가 피면 우리는 안다. 이 강산에 봄이 오고 있음을.
↑↑ (풍년화는 오래 보면 더욱 예쁘다)
ⓒ 동부중앙신문

↑↑ (관목인 풍년화는 향기가 그윽하다.)
ⓒ 동부중앙신문

유미란 기자  news911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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